목회칼럼

감동받기 위해 예배당에 오십니까?

우선동
2026-04-16
조회수 89

감동받기 위해 예배당에 오십니까?

 

오늘날 교회 예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찬송가 대신 CCM이 들어왔고, 오르간 대신 밴드가 들어섰습니다. 조명이 어두워지면 자연스럽게 손을 들고, 눈을 감고, 감정에 몰입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변화를 '살아있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표현 뒤에는 살아있다는 것을 감정으로 측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감정이 예배의 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시편을 보면 기쁨과 탄식, 분노와 간청이 도처에 드러납니다. 다윗은 춤추며 찬양했고,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했으며, 욥은 재 위에 앉아 탄식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도 침묵과 정적 속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했고, 예언했고, 기뻐 뛰었습니다. 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감정이 예배의 목적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4세기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노래가 노래되는 내용보다 나를 더 움직일 때, 나는 그것을 죄스럽게 고백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음악을 싫어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악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감동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동 자체에 머무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음악을 "신학 다음가는 최상의 선물"이라고 했을 만큼 예배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개혁자들이 오르간을 부수고 예배 음악을 거부할 때도, 루터는 찬송을 만들고 회중 찬양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음악을 사랑하던 루터도 예배의 모든 요소는 반드시 회중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원칙만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에게 감동은 예배의 목표가 아니라 바른 예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예배의 성공 여부를 감동의 강도로 측정합니다. 찬양 인도자는 회중의 감정 곡선을 조율하며 곡 순서를 짜고, 설교는 마지막 몇 분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는 불문율이 생겼습니다. 예배 팀은 리허설을 통해 감동의 흐름 자체를 미리 설계합니다. 마치 콘서트를 준비하듯 말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일까요? 인간의 감정이란 본래 변덕스럽고 소비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감동받았던 찬양도 몇 번 들으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됩니다. 더 큰 감동, 더 새로운 경험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감각의 둔화입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흥분하고 영화관에서 눈물 흘리는 것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은 경험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좋은 예배'를 '좋은 감정 경험'과 동일시하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럼 감동 없는 예배가 더 낫다는 말입니까? 형식만 남은 차갑고 건조한 예배가 신앙을 깊게 만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형식주의는 감정주의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또 다른 함정입니다. 교회 역사는 늘 이 두 극단을 오가며 균형을 찾아왔습니다. 종교개혁은 형식에 갇힌 예배를 흔들었고,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은 메마른 정통주의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어느 쪽도 홀로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방향입니다. 예배 안에서 감정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감동이 예배의 동력이 아니라 예배의 열매로 자리할 때, 그 감동은 신앙을 깊게 합니다. 반면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를 설계하기 시작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의 응답이 아니라 개인적 종교 경험의 플랫폼으로 변질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십시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기록한 예배 순서는 단출합니다. 성경 읽기, 권고, 공동 기도, 빵과 포도주, 봉헌. 이게 전부입니다. 화려한 것도 없고, 교인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고 돌아간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감동은 정교하게 기획된 프로그램이 좋은 경험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성찬, 기도와 나눔이라는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찬양 예배가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 예전만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우리는 이 질문 하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배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예배라는 경험을 소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가장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자리는 아무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예배에서도 그 자리를 지킬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정이 메말랐을 때도, 찬양이 내 취향이 아닐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배당에 오십니까? 감동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 모두 정직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감동이 있을 때만 아니라, 감동이 없을 때도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우선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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